1. 평시 미국 본토 최대 대공포 사격
1942년 2월 25일 새벽 3시 16분, 미 본토 로스앤젤레스 상공에 평시 최대 규모의 대공포 사격이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미 육군 제37 해안포병여단의 12.7cm M3 대공포 37문이 일제히 발사한 포탄은 정확히 1430발이었다. 사격이 종료된 새벽 5시경, 격추된 적기는 단 한 대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한 시간 동안 LA 상공에 있었던 “표적”이 무엇이었는지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 진주만 직후의 서부 해안 공포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두 달 전 진주만 기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이후, 미 서해안은 일본의 추가 공격에 대한 공포로 가득했다. 캘리포니아 해안 곳곳에는 임시 대공포대가 설치되었고, 시민들은 밤마다 등화관제 훈련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42년 2월 23일, 사건 이틀 전에 실제로 일본 잠수함 I-17이 산타바버라 인근 엘우드 정유 시설을 포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 본토를 향한 최초의 직접 공격이었다.

3. 비밀 경보 발령
그 다음 날인 2월 24일, 미 해군 정보국은 “앞으로 10시간 안에 일본의 공습이 예상된다”는 비밀 경보를 발령했다. LA의 모든 방공 부대가 최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발령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일본 잠수함에서 정찰기를 출격시킨다는 첩보가 있었다고 추정하지만, 일본 측 기록에는 그런 출격이 없다.
4. 새벽 3시 16분의 발사 명령
2월 25일 오전 2시 25분, LA 북부 상공에서 미확인 비행체가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약 50분 후 새벽 3시 16분, 대공포 부대 지휘관 윌리엄 오라일리 대령은 “발사. 그것이 무엇이든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한 줄의 명령으로 미 본토 평시 최대 규모의 대공포 사격이 시작되었다.

5. 1430발의 폭발과 30km 목격 구간
오전 3시 16분부터 약 1시간 동안 37문의 12.7cm M3 대공포가 하늘을 향해 1430발을 발사했다. 폭발의 섬광은 산타모니카에서 롱비치까지 약 30km 해안 전 구간에서 목격되었다. 도시는 완전히 정전되었고, 시민들은 진짜 폭격이 시작된 줄로 알았다. 그러나 폭발의 중심에 있던 표적은 격추되지 않았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그 표적은 천천히 LA 시내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동했고, 약 한 시간 후 시야에서 사라졌다. 표적의 속도는 시속 100km 정도였다. 시속 480km로 비행하는 당시 일본 폭격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느린 속도였다.

6. LA타임스의 1면 사진
다음 날인 2월 26일, LA타임스는 1면에 한 장의 사진을 게재했다. 여러 개의 탐조등 빔이 모인 교차점에 명확하게 보이는 원반 형태의 비행체가 포착된 사진이었다. 사진의 진위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1942년 LA타임스 사진 편집자는 평생 “리터칭은 콘트라스트 보정 정도였고 비행체 자체는 합성이 아니다”라고 진술을 유지했다. 같은 날 다른 신문 9곳도 비슷한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도했다. 모든 사진에서 같은 위치에 같은 형태의 표적이 확인되었다.

7. 두 장관의 정반대 발표
사건 다음 날 미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은 “적기 약 15대가 LA 상공에 침입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정반대로 발표했다. “전체가 거짓 경보였습니다. 적기는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한 사건에 대해 미군 두 장관이 정반대의 공식 발표를 내놓은 것이다. 이 모순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8. 1983년 공군의 재조사
1983년 미 공군 역사연구소는 사건을 재조사해 “기상 풍선과 전쟁 신경증이 결합한 집단 오인 사격”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결론에도 빈틈이 있다. 1430발이 발사된 한 시간 동안 37문의 대공포 지휘관 누구도 “표적이 풍선이다”라고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 풍선이 시속 100km로 도시를 가로지를 수도 없고, 1430발의 직격을 견뎌낼 수도 없다. 더구나 풍선이라면 사격 종료 후 어딘가에 잔해로 떨어졌어야 한다.
9. 묻혀진 민간인 5명의 사망
공식 발표에서 자주 누락되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날 밤 LA에서는 민간인 5명이 사망했다. 3명은 발사된 대공포탄의 파편에 맞아 사망했고, 2명은 정전과 패닉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숨졌다. 또 다른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1940년대 LA 시청은 이 피해를 “전시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한 손실”로 분류했고, 유가족에게 어떤 보상도 지급되지 않았다. 사건이 “단순한 거짓 경보”였다면, 왜 5명의 시민이 자국 군대의 포탄 파편에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확하지 않다.

10. 오라일리 대령의 유언 일기
대공포 사격을 명령한 윌리엄 오라일리 대령은 사건 이후 단 한 번도 공식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1956년 은퇴할 때까지 LA 전투에 대해 어떤 회고록도 남기지 않았다. 1981년 사망한 그의 개인 일기가 2003년 가족에 의해 일부 공개되었는데, 1942년 2월 25일자 일기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오늘 밤 본 것은 분명 비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무기로도 떨어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짧은 한 줄이 오라일리 대령이 사건에 대해 남긴 유일한 사적 기록이었다. 발사를 명령한 그가 표적을 “비행기가 아니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날 LA 상공에 있었던 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

11. 일본 측 기록의 부재
외계 비행체설을 제외한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일본의 정찰 비행기”였다. 그러나 일본 측 기록에는 그날 LA 인근에 일본군 비행기가 단 한 대도 출격한 흔적이 없다. 일본 해군 항공부대의 모든 출격 기록이 보관된 도쿄 방위연구소의 자료에서도 1942년 2월 24일에서 26일 사이 캘리포니아 방향 출격은 단 한 건도 확인되지 않는다. 만약 정찰기가 있었다면 어디서 출격해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12. 영화 한 편이 남긴 문화적 흔적
1979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이 사건을 소재로 영화 “1941”을 제작했다.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사건의 존재를 대중에게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011년에는 “월드 인베이전: LA 배틀”이 같은 사건의 “외계 비행체설”을 모티프로 제작되었다. 이런 영화들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지는 못했지만,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건이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해결 의문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13. 마치며: 80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의문
1942년 2월 25일 새벽 한 시간 동안 LA 상공에 있었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1430발의 직격에도 격추되지 않은 표적, 어떤 격추 흔적도 남기지 않은 비행체, 일본 측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 정찰기, 그리고 발사를 명령한 지휘관 자신이 “비행기가 아니다”라고 일기에 적은 그 표적. 정부 두 장관은 같은 사건에 대해 정반대의 발표를 했고, 1983년 공군의 “풍선설” 결론은 시속 100km라는 표적 속도 앞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진실은 아직 그 새벽의 어둠 속에 묻혀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어떤 의문은 80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다.